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

미국의 1달러 지폐 뒷면에는 피라미드가 있고 그 위에는 만물을 보는 눈혹은 진실의 눈이라는 불리는 프로비덴스의 눈이 인쇄되어 있다. 그것은 프리메이슨단(Freemasonry)혹은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다. 프리메이슨은 비밀결사 조직으로서 아직까지 수많은 의혹 속에 감추어진 집단이다. 따라서 각종 음모론에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는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모차르트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가 발표한 소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단원인 모차르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한다. 이집트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낸 크리스티앙 자크는 고대 이집트 신비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프리메이슨의 역사적 사실에 이집트 비전의 계승자이자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적 존재로 모차르트를 등장시킨다. 작가는 프리메이슨의 핵심 사상을 고대 이집트의 풍요의 여신 이시스와 저승을 지배하는 신 오시리스에서 찾는다. 또한 이 두 신으로부터 모차르트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추리한다. 모차르트의 4대 오페라로 불리는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돈 조반니>, <마술피리>를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아마 독자들은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존재에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7년 전인 1784년 프리메이슨 단원이 된다. 그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는 사실은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을 읽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의 모차르트의 활약은 죽기 두 달 전 그가 남긴 오페라 <마술피리>에 잘 드러난다. 오페라 <마술피리>를 감상하다보면 계속 반복되는 숫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3’ 이다. 밤의 여왕의 세 시녀, 사원을 지키는 세 소년, 사원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 세 도막 난 뱀... 숫자 3은 프리메이슨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을 작품 속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극중 등장인물 중 입 막은 당한 파파게노는 프리메이슨의 주요한 덕목중 하나인 침묵, 눈을 가리는 파미노는 가입의식을, 현명한 철학자 자라스트로는 프리메이슨의 지도자를 상징한다. , 이제 음모론에 돌입해 보자. 우리는 흔히 프리메이슨과 비밀의식을 연관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 프리메이슨은 가입사실 또한 비밀에 부칠 정도의 엄격한 침묵을 요구한다. 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프리메이슨의 비밀 서약 내용은 메이슨의 비밀을 엄수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칼로 목이 잘리고 혀가 뽑혀 바다의 모래밭에 묻혀 밀물이 나를 영원히 잊어버림으로 잡아가게 된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면 모차르트는 이 무시무시한 서약을 하고서도 그들의 비밀을 작품에 녹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음모론이 제기된다. 바로 모차르트를 프리메이슨이 독살했다는 것이다.

 

 

서른다섯 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 무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무덤 속에는 시신이 없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생겨난다. 그 미스터리 중에는 프리메이슨에 의한 독살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혹은 음모론의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사실만 편집한 정보를 선택한다는 데에 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이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비밀을 작품에서 폭로한 모차르트를 제거하기 위해 프리메이슨이 독살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마술피리> 자체가 프리메이슨의 요청에 의해 쓰여 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은 자신들의 사상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작품을 모차르트에게 요청했다. 실제로 <마술피리>의 대본을 쓴 작가 에마누엘 쉬카네더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만약 자신들의 비밀을 폭로한 모차르트를 프리메이슨이 독살했다면 쉬카네더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812년에 죽었다. 1791년에 죽은 모차르트보다 20여년을 더 살았다.

 

모든 죽음은 똑같다. 모두가 벌거벗은 채로 태어나는 것과 같이 죽음 또한 공평하게, 육체가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사라지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 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그 어떤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앨비스 프레슬리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 얼굴을 바꾼 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러한 믿음 바탕에는 앨비스에 대한 팬심을 넘어선 그의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내재해 있다. 평범한 것들 속에서 비범한 능력을 보이다가 죽어간 사람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음모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은 기꺼이 가지고 논다. 죽음조차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람들, 그 중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있다. ‘아마데우스신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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